33년 만에 국보법 누명 벗다…70세 정정자씨 재심서 무죄 ‘명예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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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DJ가 했던 말 전했다고 유죄 판결

무차별 구타로 몸 망가져 ‘떠돌이 삶’

정정자(오른쪽)씨가 33년 전의 경찰 자술서와 당시 신문 자료, 최근 받은 무죄 판결문 등을 보여주며 자신의 한 많았던 인생을 얘기하고 있다. 왼쪽은 정씨의 재심과정을 도운 한미인권문제연구소(소장 박상준)의 한시헌 사무총장. 백종춘 기자

나는 1944년 전남 함평군 대동면에서 농사꾼 부모의 4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대동국민학교’를 마친 뒤 16살 때 가족을 따라 서울로 왔습니다. 공부는 더 할 수 없었습니다. 버스안내양, 관광호텔 종업원 등 닥치는대로 일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1년 2월,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광신교통에서 안내양 기숙사 사감 겸 교양주임을 맡았습니다.

그해 5월 어느 날 15명 정도의 안내양을 모아놓고 좌담회를 가졌습니다. 안내양들은 왜 젊은이들이 잡혀가느냐며 사회문제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순화교육(삼청교육대)에 대해 들은 대로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전년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대서특필되었을 때 언론에서 들었던 내용도 말했습니다. 김대중씨가 외신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자유도 빵도 없는데 북한은 자유는 없다해도 빵이 보호된다’고 말한 것이 죄목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누가 사장에게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알렸고, 사장은 7월 1일 나를 해고했습니다. 무슨 잘못이 있냐고 따졌지만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두달 후 다방에서 일하던 나에게 경찰이 들이닥쳤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안내양들에게 무슨 얘기를 했냐며 주먹과 발로 무차별 구타를 했습니다. 자궁에선 하혈이 쏟아졌고, 눈과 귀엔 피멍이 들었습니다. 신문에 났던 김대중씨의 말을 전한 것 뿐이라고 자술서를 썼는데도 10번도 넘게 찢어버리며 쓰라는대로 쓰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집행유예로 나올 때까지 6개월을 철창에서 보냈습니다. 대법원까지 갔으나 군사정권 대법원은 1984년 징역1년, 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확정지었습니다.

판결 이후 아는 사람들은 ‘간첩사건’ 운운하며 나를 피했습니다. 구타로 오른쪽 눈은 거의 실명되고 귀는 난청이 되어 장애 등급까지 받았습니다. 직장을 구하려 열 군데나 이력서를 넣었지만 ‘국보법 전과자’임이 드러나 족족 해직되었습니다. 이력서가 필요없는 직업을 찾아 때밀이를 했습니다. 한국서 살기가 힘들어 1990년 일본으로 향했고 5년 만에 LA로 와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2006년 민주화운동관련 명예회복 대상자로 인정되었지만 가슴의 응어리는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두번이나 자살하려 했습니다. 지금도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심한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올해 2월 한미인권문제연구소 도움으로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수원지방법원은 ‘피고인이 그런 발언을 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할 명백한 위험이 초래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국보법’ 빨간 딱지를 떼고 나니 어느덧 70살이 되었습니다. 내가 조국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기쁜 마음보다는 머리와 가슴이 텅 비어버리는 허탈감이 엄습합니다.

이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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